노트의 탄생과 죽음
머릿속에 떠오르거나, 나중에 유용할 것 같은 정보들을 노트에 기록한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멋진 노트를 남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노트가 어디에 있는지, 존재 자체를 잊고 산다. 그러다 노트들이 쌓인 서랍장을 여는 순간 나도 모르는 쓰레기들이 잔뜩 쌓여 있다. 그걸 보는 자체가 스트레스다. 그 서랍장을 굳게 닫고, 이제 새로운 기분과 다짐으로 새로운 서랍장을 찾아 또 다시 쓰레기들을 쌓기 시작한다.
보통 노트의 탄생과 죽음은 이렇게 허망하게 끝이 난다. 태어났을 때의 그 기쁨과 축복이 매번 그렇게 허망하게 버림받게 되는 순간을 마주 할 때마다 마치 손가락에 박힌 가시처럼 찝찝하게 나를 괴롭혔다. 에버노트부터 삼성노트, 노션 등 수많은 노트앱들을 건너 건너 드디어 옵시디언 노트에 도착했을 때 희미하게 나마 오아시스를 보는 듯했다. 그러다 Zettlekasten이라는 개념을 접하자 그 희미했던 오아시스는 더욱 또렷하게 내 앞에 나타났다.
Zettlekasten, 과연 노트의 구세주인가?
Zettlekasten. 이름만 들어도 그냥 돌아서고 싶은 이름이다. 알고 보니 독일어로 그냥 메모상자라는 뜻이였다. 각각의 노트를 독립된 생각으로 만들고, 서로 연결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드는 노트 시스템.
이런 Zettlekasten의 개념을 더욱 발전시키고 유행을 시킨 독일 학자 Niklas Luhmann의 사고가 흥미롭다. 우리는 보통 메모를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는 결과물로 생각하는데, 그는 글을 쓰는 건 생각의 과정 그 자체라고 설명한다. 글로 써 내려감으로써 이해와 사고를 만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두 가지 상반되는 생각을 머릿속에 갖고 있다고 해보자. 그걸 머릿속에서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뇌는 기억을 꺼낼 때마다 재구성하고, 관련 없는 이야기를 연결하고, 빈틈을 메우고, 모순을 무시하고, 빠른 결론을 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로 적으면 그 생각과 거리를 두고 좀 더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가 말하는 노트를 적는 방법은 어떻게 보면 간단했다. 저장하고 싶은 것들을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Fleeting Note (개인적으로 ’raw’라고 지칭한다.) 폴더에 모은다. 저자의 핵심 내용을 최대한 유지한 채 나의 ’언어’로 (나의 ’생각’이 아니다) 그 내용들을 잘 정리하여 Literature notes (Source notes라고 부르는 게 난 더 와 닿는다) 폴더에 옮긴다. 여기서는 오로지 저자의 생각을 얼마나 내가 잘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장소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제 그 저자의 생각을 나의 고유한 지식과 경험으로 저자가 질문하지 못한 것들을 질문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Permanent note에 저장한다.
처음에는 Permanent notes를 단순히 하이퍼링크 정도로 생각했다. 본문에서 관심 있거나 유용할 거 같은 부분을 좀 더 자세히 공부하고자 다른 별도의 permanent note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정리하는.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 생각이 완전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같은 문장을 보더라도 다르게 해석한다. 각자의 지식과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zettlekasten은 그 ’다름’에 집중을 한다. 우리 고유의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저자가 보지 못한 부분에 대해 다른 생각과 질문들을 던지며 새로운 아이디어로 발전시킨다. 그 아이디어 중에서 앞으로 계속해서 재사용 가능한 노트들만 Permanent note에 기록을 하는 것이다. 원리, 주장, 개념 구분, 질문, 관찰에서 발전한 생각, 반론이나 조건들이 permanent note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permanent note를 작성할 때 몇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이 몇 가지 있다.
1. 완전한 문장으로 나만의 언어로 써야 한다.
미래의 내가 원문을 보지 않고도 쉽게 이해할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이런 Permanent note들을 모아 재배열하는 것만으로도 초안이 완성될 정도로 완전한 문장과 완벽한 독립된 아이디어야 한다.
2. 노트를 만들 때 기존 노트들과의 연결성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Zettlekasten의 가장 큰 힘은 이 노트들이 서로 연결되어 복리의 효과를 볼 때라고 생각한다. 연결이 되지 않고 독립적인 노트로만 존재한다면 단순히 ‘1+1=2’ 의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독립적인 노트들이 서로 연결이 되고, 새로운 노트들이 등장할 때마다 다시 연결이 되면 하나의 노트를 꺼내기만 해도 서로 줄기로 연결된 감자처럼 주렁주렁 다 달려 나온다. 그렇게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3. 그 연결을 위해 특정한 상황에서 추상화한 원리를 추출한다.
이렇게 연결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독립된 permanent note의 내용을 추상화하여 어떤 원리를 뽑아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로미오와 줄리엣의 소설에서 원수지간의 두 가문과 젊은 연인이라는 구체적인 상황을 추상화 한다면 집단의 갈등이 개인의 사랑과 선택을 파괴할 수 있다는 원리를 뽑아낼 수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특수한 상황은 그 소설에 국한되어 존재하지만 추상화한 원리는 다른 노트들과 연결할 수 있다.
4. Tag, 제목, 연결노트로 노트 목에 방울 목걸이 달기
tag에 넓은 의미의 단어를 적고, 제목은 추상화한 원리가 잘 드러나도록 정하고, 연결노트와 연결된 이유를 같이 적어준다. 대부분의 노트는 검색이 아니라 이처럼 다른 노트를 통해 발견된다.
Source notes를 이와 같이 정리할 필요는 없다. 그 출처 그대로의 제목과 발행처를 적어 어떤 출처인지만 알 수 있게 해라. 어차피 그 안에 permanent note 링크도 포함되어 있으니 나중에 permanent note의 출처를 확인할 때 어디 source note인지 쉽게 찾을 수 있기만 하면 된다.
당장 쓰기 쉽고, 내가 쓰고 싶은 것들만 써라.
Luhmann이 일하는 방식 또한 흥미로웠다. 책 58권, 수백 편의 논문, 약 9만 장의 Zettlekasten 노트 등 이런 엄청난 양의 업적을 남겼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많은 조수를 거느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높은 생산성을 특별한 의지력이나 천재성보다 그의 작업 방식과 Zettlekasten으로 설명했다. 당장 쉬운 일이나, 어떻게 쓸지 알거나 준비되어 있는 것들, 그리고 중간에 막히면 계속 매달리지 않고 다른 작업으로 옮긴다. 막힌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을 성실함으로 착각하지 않고 항상 자신이 가장 흥미를 느끼고, 자료가 충분한 주제를 선택할 수 있는 진정한 주도권을 가진 것이다.
힘든 일이라도 우리의 내적 목표와 일치하고, 우리가 그 과정을 통제하고 있다고 느끼면 더 이상 힘든 일이 아니게 된다. 그 통제력을 갖기 위해서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 다른 생각과 정보들로 인해 기존의 관점과 주제 자체가 달라지는 상황을 받아 들일 수 있어야 하고, 오히려 그런 과정들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더 가능성 있는 다른 아이디어가 있다면 과감하게 첫 아이디어를 버리는 것이다. 이런 유연한 행동과 사고방식이 있어야 진정한 통제력을 가지는 것이다.
나만의 노트가 아닌 남들에게도 가치를 줄 수 있는 노트
일기가 아닌 이상 나만 보려고 갖고 있는 노트는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나를 위해 정리를 해서 기록을 한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도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공유하기 시작한다. 남에게 보여준다는 생각에 마음가짐이 바뀐다. 동네 앞 슈퍼를 가더라도 비비크림 정도는 발라주는 예의가 있듯, 내가 쓴 글에 전보다 더 정성을 들이기 시작한다. 남들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글을 가다듬고, 내 글의 주장을 뒷받침하거나 반박하는 자료들을 더 찾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더 깊은 공부를 하게 된다. 내 글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피드백을 주며 내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들까지 일깨워준다. 남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시작한 일이 결국 내 생각을 더 넓히고, 더 깊게 만들고, 때로는 완전 새롭게 바꾸어 놓는다.
어쩌면 노트의 진짜 죽음은 잊히는 순간이 아니라, 끝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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