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을 때는 내 잘난 맛에 많이 살았던 것 같아. 뭐 가진 건 개뿔도 없으면서 나는 남들과 똑같은 삶은 안 살고 정말 멋지게 살겠다고 항상 생각했던 거 같아. 그러다 어느 순간 그 패기는 점점 다 사라지더라고. 머리카락 수는 점점 줄어들고, 얼굴에 주름은 점점 늘어가고. 뭐 그럴수록 그 패기도 점점 사라지는 것 같더라고. 이제는 어린 것도 아닌게 이건 늙은 것도 아닌 예매한 나이. 어느 20대가 얘기하더라고. 마흔 살이 되면 죽어버릴 거라고. 마흔이라는 숫자가 어떤 사람한테는 늙음의 시작이고 또 어떤 사람한테는 인생의 마지막처럼 느껴지기도 하겠지.
영화 ’before midnight’이라는 영화를 보면 여주인공이 자기 친구 얘기를 해. 자기 친구가 시한부 인생을 이제 9개월 받았는데 오히려 안도했다고. 이제 9개월 동안 쓸 돈이 있으니 이제 뭐 다른 걱정할 필요 없겠다고. 그때는 그냥 특이한 발상이라고만 생각했지. 근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얘기가 자주 떠오르더라고. 그 친구가 그 말 하기까지 얼마나 외로웠을까. 나도 내가 언제까지 살 수 있는지 알 수 있으면 그 시간 동안 버틸 돈만 벌고 나머지는 아무 걱정 없이 살면 되니까 편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지. 분명 인생은 행복한 때도 많지. 그런데 그보다 훨씬 긴 시간동안 걱정과 상처, 불안과 슬픔 사이에서 고통 받잖아. 마라톤을 하다 보면 코스 중간에 물컵이 놓여 있잖아. 뭐 그것처럼 진짜 포기하고 싶어질 만큼 힘든 순간들마다 꼭 한 번 씩 그런 작은 그 물컵 같은 사람이나 순간들이 우리가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뒤에서 밀어주는 것 같아. 뭐 그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운동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소소한 하루가 될 수도 있고. 뭐 이런 작은 것들이 모여서 여기까지 버텼던 것 같아.
근데 그 효과가 점점 떨어지는 것 같아. 하루에도 몇 번 씩 도전하기도 하고 또 포기하고 싶기도 하고 그 사이로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 하루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뭔가 패기로 가득 차 있다 가도 또 다음날 되면 그냥 이대로 평생 눈을 안 떴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해. 그렇게 조용히 가면 지금 이 힘든 인생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되니까. 남들처럼 성공할 능력도 없는데 그 초라한 내 자신을 인정하지 않아도 되고, 그 초라함을 인정하기 싫어서 누군가에게 증명하려고 매번 발버둥치지 않아도 되니까.
요즘은 그냥 어디론가 멀리 그냥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많아. 그곳에서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배운 것들을 다 그냥 놓아버리고 싶은 거지.
남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배운 연기,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항상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그리고 남들이 정해놓은 속도와 방법으로 꾸역꾸역 살아가는 하루하루.
그렇게 남들을 위해서 채워놓은 것들 모두 다 토해내고 이제 정말 내가 살고 싶게 하는 것들로 다 채우고 싶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를 웃게 하는 것들이 뭐인지,
남들이 인정하지 않아도 계속 하고 싶은 게 뭔지.
‘어차피 곧 끝날 인생이라면’
이게 내 좌우명인데 뭐 곧 죽으니까 막 살자는 뜻은 아니고, 어차피 곧 끝날 인생이라면 정말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들을 하다가 가자는 뜻이지. 그러다가 실패해도 어차피 죽으면 그 실패의 고통도 같이 사라지니까 일종의 보험의 효과도 있는 거지. 남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마치 인생에 도라도 튼 사람처럼 생각하는데 나도 정작 말 뿐이야. 나도 남들한테 얘기하지만 동시에 내 자신한테 말하는 것이기도 하는 거니까. 나도 아직 여전히 남들과 비교하면서 내 위치를 확인하고 또 그들보다 뒤처졌다는 생각에 불안해하고 그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려고 노력해. 어쩌면 내가 지친 이유가 힘든 삶 자체가 아니라 그 삶을 오로지 나로서가 아닌 그 사회에서, 직장에서, 가족에서 원하는 나로 연기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죽고 싶다는 게 아니야. 그냥 다시 열심히 살고 싶은 생각이 그렇게 크게 안 든다는 거지…그냥 그렇다고…
만약에 아직까지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이런 모자란 아들한테 어떤 말씀을 해주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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