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집 안에서 유리창 너머 바깥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눈은 밖을 향해 있지만 딱히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마치 사형 집행일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그러다 갑자기 누군가 돌을 던져 남자의 유리창이 깨진다. 하필 폭풍까지 몰아쳐 깨진 틈으로 비바람이 들이닥친다. 커튼이 휘날리고 바닥에는 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몸을 피하고, 수건을 가져오고, 깨진 부분을 무엇으로 막아야 할지 생각하느라 바빠진다. 인생 전체가 무의미했던 그 남자에게 순간 분명한 목적이 생겼다.

“저 구멍부터 막자”

이번엔 한 여자가 외딴 들판을 혼자 걷고 있다. 발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지만, 딱히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마치 방향을 잃은 채 해류에 떠밀리는 빈 배처럼, 발길이 닿는 쪽으로 흘러갈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는 소변이 마렵기 시작한다. 주위에 몸을 숨길 나무나 바위가 있는지, 멀리 사람이 보이지는 않는지 확인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은 또렷해진다. 조금 전까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던 사람에게 이제는 확실한 목표가 생겼다.

“일단 쌀 곳부터 찾자”

이상하게도 인간은 인생을 살아야 할 고귀한 이유를 찾느라 평생 고군분투하지만, 깨진 창문을 막아야 할 이유와 화장실을 찾아야 할 이유는 즉시 찾는다. 물론 소변을 참는다고 우울증이 낫는다는 연구는 없다. 실제로 오래 참는 일을 습관으로 만들 필요도 없다. 마음을 구하겠다고 방광까지 희생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이 우스운 상상에는 작은 진실이 숨어 있다. 우울이라는 늪에 깊이 빠진 상태에서도, 인간은 아주 작고 구체적인 문제에는 반응할 수 있다. 깨진 창문을 막고, 화장실을 찾고, 밥을 먹고, 개에게 물을 주는 동안 우울은 잠시 밀려난다. 그 틈이 치료는 아닐지라도 숨을 한 번 돌릴 공간은 될 수 있다.

어쩌면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거창한 삶의 의미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 안으로 파고드는 어두운 것들을 막을 순 없어도, 지금 들어오는 빗물은 막아야 한다. 인생에서 내가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는 몰라도, 당장 화장실은 찾아야 한다. 거창한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로도, 우리는 눈앞의 작은 문제를 해결하며 다음 순간으로 넘어간다.

어쩌면 사람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 것은 언제나 거창한 이유가 아닐지도 모른다. 때로는 깨진 창문 하나와 가득 찬 방광이 우리를 다시 세상으로 불러낸다. 삶의 의미가 우리를 구하지 못할 때, 오줌이 대신 구할 수도 있다.

인간은 생각보다 숭고하지 않다.
다행히도.